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07

욥이 극도의 고통 속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를 진실로 체험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에게 물어보신 후 사탄은 속으로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또 한번 하나님 안중의 온전한 사람을 공격할 허가를 받았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게 있어서 이것은 얼마나 얻기 어려운 기회입니까! 사탄은 이 기회를 빌어 철저히 욥의 믿음을 무너뜨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하여 더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더는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러면 사탄에게 틈탈 기회가 있게 되는데, 언제 어디서나 욥을 그것의 손아귀에 넣고 우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비록 그것의 사악한 의도를 조금도 빈틈없이 감추었지만 그것의 악랄한 본성은 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진상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답하는 그것의 말 속에서 실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경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 2:4~5)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사탄의 이 대화는 사람에게 저도 모르게 사탄의 악랄함에 대해 실질적인 인식과 느낌이 있게 합니다. 사탄의 이 황당무계한 논리를 들은 후 믿건대 진리를 사랑하고 사악을 혐오하는 모든 사람은 다 사탄의 비열함과 무치함을 더욱 혐오할 것이고 사탄이 퍼뜨린 황당무계한 논리와 그릇된 주장에 대해 혐오감과 역겨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또 욥을 위해 깊은 기도와 축원을 드릴 것인데, 정직한 사람이 온전함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영원히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어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기를 축원할 것이며, 또한 욥의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추구하는 각 사람을 영원토록 채찍질하고 격려해줄 수 있기를 축원할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모두 사탄의 이 언론에서 사탄의 악랄한 속셈을 알아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아주 쉽게 사탄의 ‘청구’에 승낙하셨는데, 단지 그것에게 한가지 조건을 주셨을 뿐입니다. (욥 2: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의 뜻은 바로 욥의 육체를 사탄에게 넘기고 다만 그의 생명은 보존하고 그의 생명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사탄이 그 어떤 방식과 수단으로 욥을 대해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 사탄은 황급히 욥의 앞에 와서 손을 뻗어 그의 가죽에 상처를 입혀 온몸에 종기가 나게 했습니다. 욥이 피부의 아픔을 느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기묘와 거룩을 찬송하자 사탄은 더욱 위세를 부렸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해하는 즐거움을 느꼈기에 손을 뻗어 욥의 살을 잡아 그의 종기를 헐게 했습니다. 문득 욥은 피와 살의 더없는 아픔과 고통을 느꼈고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온몸의 피부와 살을 주물렀는데, 이러면 육체의 아픔으로 가져오는 심령에 대한 충격을 감소시킬 수 있을 듯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계심을 의식하고 자신이 굳세지도록 노력하면서 또 한번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사람의 비참한 처지를 살펴보시나이다. 사람의 연약을 왜 또 염려하시나이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탄은 비록 아픔을 참기 어려워하는 욥의 모습을 보았지만 욥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저버리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급히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상하게 했는데, 욥을 갈기갈기 찢어죽이지 못해 한스러워했습니다. 순식간에 욥은 전에 없던 고통을 느꼈는데 마치 살이 뼈에서 찢겨 떨어지는 듯했고 또 마치 뼈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았습니다. 비통하기 그지없는 이 아픔은 그에게 사는 것이 죽기보다 못함을 느끼게 했습니다……그의 인내력은 극한에 달했습니다……그는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고 살을 찢어 아픔을 감소시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외치고 싶은 것을 참았고 살도 찢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탄에게 그의 연약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다시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었지만 그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의의가 결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받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그의 앞에도 계시고 그의 뒤에도 계시고 그의 좌우에도 계시지만 그가 아파할 때는 전혀 아파하는 모습을 보시지 않고 얼굴을 가리고 숨기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욥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몸의 아픔을 억지로 참으면서도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감사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일격에도 견디지 못하고 연약하고 무기력하며 어리고 무지한데 당신께서 왜 이처럼 염려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나이까? 당신께서 저를 격타하시면서도 스스로 고통받으려 하시는데, 사람에게 어찌 당신이 염려하시고 걱정하실 만한 가치가 있겠나이까?” 욥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고 그저 조용히 보고만 계셨습니다…… 사탄은 온갖 수단을 다 부려도 결과가 없자 조용히 물러갔습니다. 하지만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은 결코 이로 인해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몸에서 나타내신 큰 능력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욥의 이야기는 결코 사탄이 물러감에 따라 끝나지 않았고 더 다채로운 장면이 각개 인물의 출현에 따라 계속 상연되고 있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다른 한 방면의 표현은 매사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이다
욥이 사탄의 참해를 실컷 겪어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을 때 그의 아내가 첫 번째로 나서서 사람이 볼 수 있는 사탄의 역을 맡아 욥을 공격했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욥 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것은 사탄이 사람의 역을 맡아 한 말인데, 이 말에는 공격, 참소가 섞여있고 유혹과 시험, 비방도 섞여있습니다. 사탄이 욥의 육체를 공격해서 이루지 못하자 또 직접 욥의 순수함을 공격함으로써 욥으로 하여금 그의 순수함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더는 계속 살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사탄은 또 이런 말로 욥을 유인하려고 했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이름을 저버리면 이 모든 고통을 참을 필요가 없으며 이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느니라” 아내의 권고에 욥은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욥 2:10)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은 욥의 오랜 시간 동안의 인식인데, 단지 이 말에 대한 욥의 인식의 진실성이 그때에 실증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권고하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는데, 뜻은 “당신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대하는데, 왜 아직도 그를 저버리지 않냐? 당신이 아직도 살아서 뭐해? 당신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이렇게 불공평한데도 늘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라고 말하네요. 당신이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데, 그가 왜 당신한테 화를 당하게 해? 빨리 하나님의 이름을 저버리고 더는 믿지 마. 이러면 당신한테 재앙이 없어져.”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보시려는 욥의 간증이 또 생긴 것입니다. 이 간증은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고, 우리가 성경의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이 이런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보셨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 기회를 빌어 욥으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옳은 분임을 실증하게 하셨을 뿐입니다. 아내의 권고에 욥은 그의 순수함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도 저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가치가 높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한가지 사실만이 이 말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는데, 이 말의 가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마음속으로 칭찬하시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듣고자 하셨던 말이며 하나님께서 보기를 바라셨던 결과인 데에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욥의 간증 중의 정수(精髓)입니다. 여기에서 욥의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이 실증을 얻었습니다. 욥의 소중함은 바로 그가 시험을 받고 더 나아가 그가 온몸에 종기가 났을 때, 그가 가장 고통스러워할 때 그의 아내와 그의 친족들이 모두 그를 권고한 동시에 그가 여전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데에 있습니다. 즉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시험이 임하든지, 얼마나 큰 환난과 고통이 임하든지, 설령 죽음이 임하더라도 하나님을 저버릴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보다시피, 그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는 가장 중요한 것이고 또한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그의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문에서 그에 대해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는 이런 평론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케 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그의 마음과 입이 일치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보신 진실한 욥입니다. 이것도 마침 하나님께서 욥을 귀하게 여기신 원인입니다.
욥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오해
욥이 받은 이런 고통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 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도 아니라 사탄━하나님의 원수가 직접 저지른 것으로 인해 욥이 고통받은 정도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때 하나님에 대한 그의 평소의 마음속의 인식, 평소의 행사 원칙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전부 발표해냈는데, 이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만약 욥에게 시험이 임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시련하지 않으셨을 때 그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이 말을 한다면 당신은 “욥, 이 사람은 아주 위선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재산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욥이 시련을 받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는 이 말을 한다면 당신은 “욥, 이 사람은 허풍치기 매우 좋아하고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늘 축복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화를 입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저버렸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보기를 싫어하고 임하기를 싫어하고 임할까 두려워하고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차마 보실 수 없는 상황에 있을 때 여전히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는 그의 순수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욥의 그때의 표현에 대해 공리공론을 늘어놓기 좋아하고 글귀 도리를 말하기 좋아하는 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고,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련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그 사람들은 욥이 지킨 순수함에 의해 정죄당했으며,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그 사람들은 욥의 간증으로 인해 심판을 받았습니다. 시련 속에서의 욥의 표현과 욥이 한 말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질투를 느끼며 어떤 사람은 의혹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경시의 태도를 드러내보이면서 욥의 간증에 대해 코웃음까지 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욥이 시련 속에서 받은 고통을 보고 욥이 한 말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욥이 시련이 임했을 때 드러낸 인성의 ‘연약’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연약’이 그들이 여기는 욥의 소위 온전함 중의 온전하지 못한 것이며, 동시에 이 ‘연약’이 ‘하나님 안중의 온전한 사람’의 흠으로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모두 온전한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고 흠이 없고 오점이 없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에게 연약이 없고 아픔의 느낌이 없고 슬픔과 괴로움의 정서가 없고 미움이 없고 그 어떤 겉면의 과격한 행위도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이 진정 온전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련 속에서의 그의 많은 행위가 사람의 ‘인가’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욥이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었을 때 결코 사람의 상상처럼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은 것으로 인해 크게 소리내어 운 적이 없었는데, 그의 이 ‘실태’가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아주 몰인정하다고 여기게 했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눈물도 없고 혈육간의 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최초에 욥이 사람에게 남겼던 ‘나쁜 인상’이었습니다. 뒤이어 욥의 일련의 행위는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게 했습니다. ‘겉옷을 찢은’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무례하다고 이해되고 ‘머리털을 민’ 것은 하나님에 대해 모독의 뜻과 반박의 뜻이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되었습니다. 욥이 말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이 말 외에 사람은 욥의 몸에서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그 어떤 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욥, 이 사람에 대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평가는 단지 그에 대한 몰이해, 오해, 의심, 정죄와 도리상의 인가, 이 범위 안에 머물러있을 뿐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신 이 말씀을 진정 이해하거나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욥에 대해 위의 인상이 있게 된 기초상에서 사람은 욥의 의(義)에 대해서도 한층 더 깊은 의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한 것과 경에 기록된 그의 표현은 사람의 상상처럼 하늘땅도 놀라고 귀신도 흐느끼는 것과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어떤 ‘장거(壯擧)’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또 세상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고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욥의 의에 대해 의혹이 생기게 하고 심지어 부정하는 태도까지 생기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몸을 긁고 있는 동시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맹세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본 것은 욥의 연약뿐이고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욥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한 말을 들었을지라도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거나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었으며 여전히 욥의 말에서 욥의 의를 볼 수 없었습니다. 욥이 시련을 겪는 고통 속에서 사람에게 준 인상은 거의 모두 대범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그의 행위의 배후에서 일어난 그의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볼 수 없었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속의 경외와 그가 지킨 ‘악에서 떠나는’ 도의 원칙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대범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온전함과 정직함이 단지 한마디 빈말에 불과하고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도 단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의 ‘연약’은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인상이 깊게 했고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정의(定義)하신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에 대해 ‘괄목상대’하거나 심지어 ‘새로운 이해’도 있게 했습니다.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을 때 내가 말하는 ‘괄목상대’와 ‘새로운 이해’가 여기에서 실증된 것입니다.
비록 그가 고통받은 정도를 누구도 상상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지만 그는 ‘대역무도’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단지 그 자신의 방식으로써 몸의 고통을 감소시켰을 뿐입니다. 그가 이런 한마디 말을 하였는데, 원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욥 3: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이 말을 아주 중요한 말로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아마 유의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이 말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뜻이 있습니까? 이 말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뜻이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욥이 한 이 말에 대해 생각이 있고 ‘욥이 온전하고 정직한 이상, 그 어떤 연약과 괴로움의 표현도 없어야 하고 반대로 마땅히 “적극적”으로 사탄에게로부터 오는 그 어떤 공격이든 직면해야 하며 심지어 웃는 얼굴로 사탄의 시험을 마주하고 사탄이 그의 육체에 가져다준 그 어떤 고통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도 없어야 하며 자기 마음속의 그 어떤 느낌도 표현하지 말아야 옳으며 심지어 하나님께 이런 시련이 좀 더 맹렬하게 오게 해달라고 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의지가 굳센 사람이 표현해야 할 바이고 구비해야 할 바이다.’라고 여기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욥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그저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을 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뜻은 더욱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말하기는 쉽지만 막상 해보면 아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욥의 이런 시험을 겪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욥의 이런 재난을 겪은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욥의 이런 재난을 겪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런 책임과 이런 부탁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욥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며 더욱이 욥처럼 이런 고통이 임할 때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 외에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고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사람도 해낼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 욥의 이 일을 말하는 것은 욥의 행위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의 의인으로서,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간증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람으로서, 사탄으로 하여금 머리를 감싸쥐고 도망하게 하여 더는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람으로서의 그를 좀 칭찬하면 안 될 것이 있습니까? 설마 여러분의 요구 표준이 하나님의 것보다 더 높단 말입니까? 설마 여러분이 시련이 임했을 때 욥보다 더 잘 했단 말입니까? 하나님도 칭찬하셨는데, 여러분에게 또 무슨 의문점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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